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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록 : 네 가지 시선 - 의자왕 편

열정 2.0 2024. 5. 31.

이번 주 설록 : 네 가지 시선은 멀리 삼국 시대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논쟁도 잘 되지 않았던 '의자왕'을 모셔왔네요.

'의자왕'.

저도 역사를 배울 때, '의자왕 = 낙화암 = 삼천궁녀' 정도. 좀 더 들어가면 백제의 마지막 왕 이라는 정도였습니다.

그런 백제의 마지막 왕이 왜 이렇게 박하게 표현되었는가, 재평가되어야하지 않나를 끄집어 내기 위한 한 편이라고 평하고 싶네요.

 

이번 주 패널로는 처음으로 황제성 님과 서동주 님이 나오셨네요. 특히나 황제성 님은 '설록 : 네 가지 시선' 포스터에 등장했는데, 본 프로그램에는 나오지 않아서 이상했던 터였습니다. 이번 의자왕 편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나 봅니다.

 

네 가지 시선으로는,

역사 스토리텔러 - 썬킴

역사전문가 - 안정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 한창수

웹툰작가 - 무적핑크

등장하셨습니다.

 

썬킴 님과 안정준 님이야 그동안 설록에 자주 나오셨 분인데, 한창수님 그리고 특히 무적핑크님은 다소 생소합니다.

근데 작품을 알아보니 나오실만하네요.

그녀의 대표작이 '조선왕조실톡'이네요.


개인적으론 역사를 이렇게 좀 색다르게 접하면 좋겠습니다.

제가 설록을 자주 보는 것도 이런 의미가 있죠.

우리 세대의 역사란 과목은 그냥 암기과목이었는데, 설민석 선생 부터였나요?

역사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그런 분들의 노력들이 현재 세대분들이 보다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 생각됩니다.

 

첫 번째 시선 - 삼천궁녀설의 진실 = 백제 멸망의 이유는 왕후 '은고' 때문이다?

 

의자왕은 의롭고 자비로운 분이셨다.

 

삼천궁녀 의자왕은 어찌보면 현대판 가짜 뉴스라는 시선입니다. 망국의 군주란 이유로 말이죠. 나름 일리가 있는 시선입니다. 아무래도 정복을 한 나라의 입장에서는 이 나라가 이렇게 잘 못하고 있었고, 왕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정복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식으로 역사에 남기기 위해서였을 거란 시선이죠.

 

팩트 체크 들어가봅시다.

 

당시 사비성 부여는 인구 5만명의 도시입니다. 660년 7월, 삼천명의 궁녀가 있다는 게 말이 안된다는 의견입니다.

오히려 다른 문헌에서 보면 '삼천'이란 의미가 본래의 '3,000'이 아닌 '많다'를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이죠.

비유적으로 말이죠.

 

 

대신 서자가 41명, 총 자식수가 80명 이상이 된다는 기록 때문에 궁녀가 이렇게 많았을 것이라는 뒷받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도 다른 평가가 있죠. 당시에 왕이 자식을 많이 갖는 것은 우군을 많이 만들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삼천궁녀, 의자왕이 서술되어 있는 것이 신라 출신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서 입니다. 정복자의 입장에서 쓴 역사서라는 것을 한 번 생각해봐야한다. 이런 평가입니다.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고려 시대의 역사학자 김부식이 1145년에 완성한 한국 최초의 정사(正史)입니다. 

이 책은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총 50권 3종(본기, 연표, 지리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삼국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역사서로서, 후대의 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습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주로 기존의 역사 기록과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들, 그리고 당시까지 전해진 각종 문헌들을 참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기록의 나열을 지양하고, 역사적 사실을 엄격하게 검증하여 기록하는 방식을 취했으며, 이로 인해 삼국사기는 고대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료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중요성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을 넘어서, 당시의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 다양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이 작업은 고려 시대의 학문과 문화가 어느 정도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예로도 평가받습니다.

삼국사기는 후대에 삼국유사와 함께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본 자료로 여겨지며,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 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비슷한 케이스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소개되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였습니다. 

그녀는 1755년 11월 2일에 태어나 1770년 프랑스 왕 루이 16세와 결혼하여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과소비와 사치를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큰 불만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그녀는 프랑스 국민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백성이 빵이 없다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라는 말이 그녀에게 귀속되기도 하였으나, 이 말이 실제로 그녀에 의해 한 말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화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1792년 프랑스 혁명이 극에 달했을 때, 루이 16세는 처형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1793년 10월 16일에 처형되었습니다. 그녀의 생애와 죽음은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의 급진적 변화와 귀족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은 후세에 다양한 예술 작품과 문학에서 다뤄지며, 복잡한 역사적 인물로서 그녀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해 왔습니다. 그녀는 일부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희생양으로, 다른 일부에서는 무책임한 귀족의 전형으로 여겨집니다. 

이처럼 의자왕은 역사적으로 재해석이 필요한 왕이다라고 썬킴님이 의견을 주셨네요.

 

두 번째 시선은 안정준 역사 전문가님 - 정복 군주 의자왕 - 의자왕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의자왕은 신라를 떨게 만든 정복 군주였다고 합니다. 654년까지 신라를 몰아부쳤다고 합니다. 즉위 2년만에 신라를 침공하기 시작해서 신라의 40개 성을 함락시켰고, 총 11회 침공, 80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니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싫었을 것 같습니다.

사택왕후

사택왕후는 백제의 왕후로, 백제 무왕의 왕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많지 않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택왕후는 백제의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녀의 가문은 백제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택왕후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유물 중 하나는 '사택지적비'입니다. 이 비석은 백제의 귀족 사택지적이 자신의 부모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문에는 사택 가문의 권력과 부유함, 그리고 불교에 대한 신앙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비석은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택왕후는 백제 말기의 역사적 인물로, 그녀의 존재는 백제의 정치와 문화, 그리고 당시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많은 부분이 추정과 해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택왕후의 견제 속에 의자왕은 30년을 기다려 태자로 책봉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의자왕은 자신이 왕이 된 이후 반대파 숙청으로 빠르게 왕권을 강화하고, 바로 신라의 성을 함락하러 다녔으니, 그의 준비성은 정말 철저하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의자왕의 무시무시함으로 인해, 신라는 당나라에 나당 연합군을 제안했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백제를 견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와 싸우느라 바쁜데(당 태종 - 고구려 원정 실패) 백제까지 신경을 형편이 되지 않았죠. 하지만 백제 의자왕의 다양한 신라 공격은 신라로 하여금 당나라에 나당 연합군을 제안했고, 이를 받아드린 당나라와 신라의 합동 공격으로 이어지게 만들어진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1,900척 13만 대군의 당나라가 백제를 쳐들어왔다고 하니 대단하죠. 

그리고, 의자왕은 최후의 순간까지 공주성에서 당나라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공성을 준비했으나, 예식진이라고 하는 신하의 배신으로 나당연합군에 항복을 청하러 가는 굴욕을 맛보게 됩니다.

 

세 번째 시선은 한창수 박사님의 시선이었습니다. 50대 중반, 의자왕이 방탕해진 건 노화때문이다. 암 때문이었다.

이를 근거로 역사적으로 의자왕이 위가 안 좋았다는 근거를 보여주셨고, 당시 나이 50대이면 현재의 나이로 70대 정도. 그러니 충분히 심리적 변화가 있었을 것이고 이로 인해 태자 책봉이후 보여줬던 다양한 업적에 대한 만족 이후 방탕해진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하셨습니다.

네 번째 시선은 의자왕의 미적 감각에 대해 이야기 해줬습니다. 그 근거로 목화자단기국을 보여줬는데, 정말 아름다운 바둑판이네요.

무적핑크님은 이 단 하나의 목화자단기국 사진을 통해 의장왕이 가진 미적 감각 뿐만 아니라, 당시 백제의 교역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줬습니다. 동남아시아와의 교역 가능성 혹은 중국을 통한 간접 무역으로 바둑판 옆면에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동물과 인종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수장고

일본의 "수장고(蒐集庫)"는 다양한 예술 작품이나 역사적 유물을 수집하여 보관하는 곳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일본의 대표적인 수장고 중 하나인 도쿄 국립박물관(Tokyo National Museum)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도쿄 국립박물관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박물관 중 하나로, 1872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이 박물관은 일본의 다양한 예술 작품과 역사적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특히 일본 고대 미술과 아시아 미술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도쿄의 우에노 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여러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관(Honkan):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는 전시가 주로 이루어집니다. 

시대별로 분류된 일본의 도자기, 칼, 갑옷, 불교 예술 등을 포함한 다양한 컬렉션을 갖추고 있습니다.

도요칸(Toyokan): 아시아 예술 전시관으로,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 등 아시아 각국의 예술과 유물을 전시합니다.

헤이세이칸(Heiseikan): 특별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일본 고대 역사와 고고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갤러리 오브 하오리(Gallery of Horyu-ji Treasures): 나라 시대의 불교 예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특히 법륭사(Horyu-ji)에서 기증받은 불교 관련 유물들을 선보입니다.

국보관(Kokuhokan): 일본의 국보와 중요한 문화재를 전시하는 공간입니다.

도쿄 국립박물관은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의 예술과 문화를 탐색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처음에는 왜 일본의 수장고에 왜 백제 의자왕이 만든 목화자단기국이 있나 했더니, 의자왕이 외교를 위해 왜에 전달한 선물이더군요. 물론 이후 일본이 백제에 선물 받은 것이 아닌 일본 고유의 제작품이라는 논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일본은 왜 이럴까요? 중국도 그렇고 왜 다들 뛰어난 보물들을 자신들이 이루어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를 증명한 건 우리나라 선조들이 남긴 증거들이었겠죠. 사실 바둑을 몰라서 바둑판에 남긴 화점으로 논란을 잠재웠다는 것을 처음에는 이해 못 했답니다. 결론적으로 바둑을 즐기는 나라는 크게 일본, 우리나라, 중국, 티베트 이렇게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순장바둑을 즐겼습니다. 각 나라 마다 틀린 화점의 갯수가 결국 백제가 만들었다는 증명을 했다고 하네요.

 

전체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의자왕의 방탕했던 모습들은 승자들이 남긴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패자의 모습일 수 있다는 점과 의자왕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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